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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온화한 태평양 '서핑의 메카'

북미를 3년 넘게 구석구석 다니고 있다. 도시를 지나지만 번잡하지 않은 시골에 머무른다. 자연은 안식과 심연의 나를 바라보게 한다. 넓은 북미대륙의 자연풍경은 동서를 가르는 로키산맥을 기준으로 확연히 틀린 경치가 펼쳐진다. 로키산맥 동쪽으로는 대평원이 펼쳐지고 특징없는 잔잔한 산들과 남쪽으로는 대지가 이어진다. 동부를 끼고 있는 대서양 바다는 냉냉하고 밋밋하다. 반면 안개에 쌓인 태평양 바닷가는 아련해 동양화 화폭같이 아름답다. 서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경이로운 풍경이 장관이지만 동부는 신대륙 개척과 오늘의 미국을 일궈낸 역사가 볼거리다. 많은 민족들이 이민와 섞여사는 미국의 도시와 마을은 개성이 뚜렷하다. 서해안은 동해안보다 개척이 늦고 정착한 다양한 민족과 날씨의 영향으로 동부와는 문화의 차이가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는 스페인 식민지였고 멕시코의 영토였기에 서해안의 남서쪽 지역은 히스패닉 문화가 강하다. 서해안 도시는 인구가 많은데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집중해서 살고 있다.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과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타운이 유명한 문화 중심지이다. 서해안은 또한 미국 내 녹색 도시의 비율이 비례적으로 높아 자전거 타기 및 유기농 농사와 같은 다양한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프랑스 작가 기욤 페이는 캘리포니아와 유럽을 비교하면서 캘리포니아는 "비정통성, 히스테리컬 한 땅(지진), 동서문화의 조화의 장소, 끊임없는 소용돌이의 현장, 끊임없는 유행의 리듬을 이어가는 곳"이라고 했다. 태평양 북서부, 포틀랜드와 시애틀은 모두 세계의 커피 수도로 간주된다. 스타벅스는 시애틀에서 시작 되었지만, 두 도시는 소규모 커피 로스터와 독립 커피숍으로 유명하다. 북서부의 문화는 특히 바다, 숲, 산과 비에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이런 영향은 많은 양질의 도서관과 서점(Powell's Books와 Seattle Central Library )과 "친환경적 환경과 영혼"을 가지고 있게 했다. 태평양 해안가 도시와 마을들은 다양한 개성이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70마일 정도 남쪽으로 내려오면 몬트레이만 북쪽에 아름다운 해안도시 샌타크루즈가 나온다. 1760년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신성한 십자가'라는 의미의 샌타크루즈라고 지명이 붙여진 곳이다. 샌타크루즈는 사계절 온화해 겨울에도 서핑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미본토에서 처음으로 서핑의 역사가 시작된 서핑의 성지이다. 1885년 3명의 하와이 왕자 형제인 조나 (Jonah), 데이비드 (David)와 에드워드 카와나나코아(Edward Kawananakoa))가 고향의 바다를 그리워하며 서핑을 하다 서핑을 전수했다. 이후 하와이 출신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이며 전설적인 서핑 선수인 듀크 카하나모쿠가 샌타크루즈에 정착하며 서핑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백 년 전에는 세계 최초의 서핑박물관(Santa Cruz Surfing Museum)이 해안가 등대 1층에 세워져 서핑의 메카가 되었다. 박물관에는 카하나모쿠가 만든 최초 서핑 클럽의 역사도 볼 수 있다. 1963년 비치보이스(Beach Boys)가 불러 세계적으로 히트한 경쾌한 리듬의 'Surfin' USA'. 노래 가사에도 샌타크루즈가 나온다. 샌타크루즈는 1927년에 현지 신문이 그 별명을 지은 후 "서프 시티(Surf City)"라는 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샌타크루즈는 서핑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면서 샌타크루즈 비치 보드워크(Santa Cruz Beach Boardwalk)가 생기고 도시가 유원지화 됐다. 또 이곳은 고래들의 이동 통로여서 대왕고래, 귀신고래, 흑고래 등 다양한 고래를 관찰하기 좋은 곳이다. 샌타쿠르즈 해안에는 파도의 높이에 따라 자기 실력에 맞게 파도타기를 즐기는데 서핑 박물관 앞 해안가 포인트 샌타크루즈(Point Santa Cruz)가 서퍼들을 관람할 수 있는 전망 포인트이다. 높은 파도를 가르며 공중 회전을 돌고 점프를 하며 빠른 속도에서도 안정적으로 몸의 균형을 잡아가는 서핑을 보노라면 마치 9회말 투아웃 만루 상황의 야구경기를 관전하듯 아슬아슬하고 흥미진진하다. 보기만 해도 청량감이 도는게 파도타기 관전이다. 알림=지난 3년여 동안 연재해 온 '신현식의 대륙탐방'이 이번 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2019-09-24

거칠지만 멋진 풍경…카우보이 영화 단골 촬영지

1610년 미 대륙에 영국인 이민자가 정착하기 시작했다. 초기 이민자들이 해안가에 마을을 만들고 농경지를 경작하며 정착에 성공했다. 이민자가 증가하자 내륙으로 땅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땅을 두고 아메리칸 인디언과 이주민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1620년부터 1890년 사이에 백인 정착민(white man)과 원주민인 아메리칸 인디언 사이의 정복 전쟁을 미국 인디언 전쟁(American Indian wars)이라고 한다. 1800년대에는 미국 인디언 전쟁이 대규모로 커졌으며 인종 청소, 학살 등으로 표출되었다. 1890년 12월 29일 큰발 추장(Big Foot)은 자신을 따르는 350여명의 수족 인디언들과 함께 운디드 니 크릭 근처의 라코타 족 파인 릿지 인디언 보호구역(Pine Ridge Indian Reservation)으로 이동했다. 제임스 포사이스(James William Forsyth)대령이 지휘하는 제7기병대 500여명이 항복한 인디언들을 무장해제하던 중 한 인디언이 저항했다. 포위하고 있던 미군들은 인디언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무기를 가지고 있던 인디언들은 반격을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비무장의 인디언들 까지 사살되었다. 이 사건으로 큰발 추장을 비롯 노인, 여자와 어린아이 146명이 사망하고 5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미군은 25명이 숨지고 39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미국은 운디드 니 전투(Battle of Wounded Knee)라고 표현하고 인디언들은 학살(massacre)이라고 주장한다. 미군은 운디드 니 전투를 인디언과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대평원 평정의 대미를 장식했고 미대륙에 평화가 찾아왔다. 서부가 안정이 되고 미국은 넓은 국토와 풍부한 천연자원,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무서운 속도로 발전해 나갔다. 미국은 부국이 되고 국민들은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 1872년 인디언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받은 윌리엄 프레데릭 코디(William Frederick Cody)가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Buffalo Bill's Wild West Show) 공연으로 인기몰이를 했다. 1872년 시작한 와일드 웨스트 공연은 수백 명의 카우보이, 인디언, 기병대원들이 배우로 나와 서부 개척시대의 모습을 재연했다. 영화가 나오기 이전의 대규모 공연으로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20세기 들어 토머스 에디슨 등 세기의 발명가들에 의해 영화 영사 장치가 발명되고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서부개척사는 극적이며 흥미진진해 무수한 서부극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인디언을 물리친 미국인의 개척정신을 그린 서부극은 1914년 '대열차 강도'를 시작으로 미국영화의 독점적인 장르로 발전해 나갔다. 서부극 전문 거물급 감독 존 포드의 '포장마차'(1939), '황야의 결투'(1946) 등이 유명하며 1952년 게리 쿠퍼가 주연한 '하이눈'이 서부극의 고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서부영화는 1960년대 들어 서부개척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하기 시작했다. 인디언 학살을 반성하는 아서 펜 감독의 '작은 거인'(1970), '솔저 블루' 등의 서부극이 제작되기도 했다. 서부 영화에는 눈 덮인 산과 바위, 사막의 거칠지만 아름다운 자연풍경이 어울어진다. 애리조나주와 유타주에 걸쳐 자리한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 유타주 남동부의 모압(Moab), 와이오밍주 티턴 산맥(Teton Range), 유타주 캐나브(Kanab), 캘리포니아주 앨라배마 힐스(Alabama Hills) 등에서 촬영을 했다. 서부영화 제작자들은 1920년부터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동북쪽으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Sierra Nevada mountain range)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론 파인(Lone Pine) 마을 주변 앨라배마 힐스(Alabama Hills)에서 400개 이상의 풍경을 찍었다. 지금도 이지역에서 영화와 자동차 광고를 촬영한다. 론 파인 휘트니 포털 로드(Whitney Portal Road)를 타고 서쪽으로 2마일 가량 이동하면 무비 로드(Movie Road)를 만나는데 영화를 찍었던 장소를 둘러볼 수 있고 마을에는 서부영화 박물관(Lone Pine Film History Museum)이 있다. 2006년 개장한 서부영화 박물관은 서부 영화 장르와 관련된 다양한 컬렉션을 수집, 보존 및 전시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미국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서부영화 박물관 중 하나인데 미국의 개척시대 역사도 엿볼 수있는 곳이다.

2019-09-17

강제수용된 일본계 11만 명의 흔적

에드거 케이시(Edgar Cayce)는 미국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사람, 20세기 최고의 예언자로 불린다. 그는 1929년 대공황을 예견했고, 1935년 오스트리아, 독일 그리고 일본이 함께 손잡고 세계2차대전을 일으킬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2차대전 이후 유대인의 이스라엘 탄생과 광우병, 소련 해체를 정확히 예언하는 등 인류의 운명에 관한 수많은 예언을 했다. 그리고 대량살상용 미사일이 LA를 겨냥해 극동지방에서 발사 된다고 예언 했다. 대량살상용 미사일이 LA를 겨냥해 북한에서 발사됐다. 미국의 강력해진 제재와 경제적 파탄, 선제공격 가능성으로 국가 존속의 절대절명 위기에 처한 북한이 미국에 선전포고도 없이 선제 공격을 한것이다. 그러나 미 본토에서 27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미국의 대공방어 미사일이 이를 요격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미국은 전시상태를 발령함과 동시에 LA를 중심으로 미 전역에 흩어져 체류하는 한국인 영주권자, 학생, 주재원, 여행자에게 수일내 미국에서 강제출국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인 시민권자 한인들을 오지의 집단수용소에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 가상의 이야기는 미국에 사는 한국인 이민자로서는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얘기다. 실제로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약 11만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수용했다. 일본인들은 일찌기 하와이로 이민와 성공적으로 정착을 했고 1900년대 초에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농업을 했다. 일본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경제적으로 성공해 나갔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볼모가 된 일본계 미국인들은 전쟁과 무관한 선량한 미국시민들이었다. 같은 시기 적대 국가였던 독일계나 이탈리아계 미국인은 감시를 했을뿐 집단 강제수용은 하지 않았다. 일본계 미국인을 강제수용한 것은 어떻게 보면 미국 백인에 의한 동양인 인종차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면 특정 민족이나 인종, 새로운 이민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박해한다. 미국 역사상 차별과 천대받은 대상들은 흑인노예, 미국원주민, 동양인이다. 미국은 1800년대 미시시피강 동쪽에 살던 인디언들을 오클라호마로 강제 이주시킨 전력이 있다. 지금도 미국의 일부 정치인들은 인종차별적 정책과 발언을 스스럼없이 한다. LA를 출발해 캘리포니아 내륙을 종단하는 395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면 데스 밸리 서쪽입구 마을 론 파인(Lone Pine)이 나오고 16마일 더 올라가면 2차대전시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했던 지금은 국립사적지가 된 만자나 강제소용소가 나온다. 만자나는 LA와 캘리포니아 출신 일본계 미국인 1만여명을 집단수용했던 뼈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 이후 1942년 2월 23일 일본 잠수함이 캘리포니아 앞바다에 나타나 사격을 가하고 사라지자 서부해안 방어를 위해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주 일본인들을 우선 강제수용했다. 약 11만명의 일본계 미국인을 10곳에 나눠 수용했다. 서부지역 방위사령관인 존 드윗 장군이 이 지역 일본인들이 폭동과 사보타주할 가능성이 있다고 국방부에 보고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42년 5월 3일 서부지역 방위사령관인 존 드윗의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5월 9일 정오까지 모든 일본계는 정부에서 지정한 장소로 집합할 것. 이 시간부터 일본인들은 주거를 옮기는 것을 금함. 소지품은 1인당 트렁크 2개만 가능. 나이프와 포크, 숟가락, 접시, 컵, 밥그릇, 냄비 등을 지참할 것." 만자나에 강제수용된 일본인들은 비좁은 수용소 생활보다 한여름에 화씨 110도 이상 오르는 사막의 뜨거운 열기와 겨울의 추위에 고생했다. 인권은 상상할 수 없는 단어였다. 일본인들은 만자나 강제수용소에 1945년 11월까지 약 3년간 갇혀 지냈다. 수용소에서 멸시를 받으며 살고 있던 일본계 미국인 청년 1200명이 미군에 자원입대해 이탈리아에서 전공을 올렸다. 당시 LA에 살던 한국계 미국인 김영옥은 442연대 100대대의 작전장교(김영옥 대령은 미군 최초 동양인 출신 전투부대 대대장이었고 한국전에도 참전한 전쟁 영웅이다)로 일본인들을 이끌고 참전해 이탈리아와 프랑스 정부로부터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만자나 수용소는 1972년에 캘리포니아주 사적지로 지정이 되고, 1988년 미국정부는 당시 강제수용되었던 일본인들에게 1인당 2만 달러씩 보상했다. 1992년에 부시 대통령은 '일본인 강제수용은 미국 역사의 오점이며 미국 국민을 대표해 공식으로 사과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만자나는 한국인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이시기 한국을 식민통치했던 일본이기에 감정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곳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번영을 걱정하는 미국에 사는 한국인 이민자로서 한번 쯤 들러봐야 할 곳이 아닌가 싶다.

2019-09-10

'성이란 무엇인가'…뮤지엄에서 답을 찾다

세계인이 뒤섞여 사는 도시 뉴욕은 세계의 중심지 답다. 약 170여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고, 인구의 36.7%가 외국 태생이고 지배적인 국적은 없다. 한인도 14만명 정도가 뉴욕시 전역에 흩어져 산다. 전철을 타보면 영어는 온데 간데 없고 전세계 다양한 민족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세계의 모든 인종이 섞여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멜팅 팟'(Melting Pot)을 실감한다. 길을 나서도 마찬가지다. 전세계 수많은 인종들과 그들이 가져온 생활과 문화의 산물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수백 년 전에 이민 온 사람과 몇 달 전에 이민 온 사람, 오늘 도착한 관광객이 섞여 사는 곳이 뉴욕이다. 이렇게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민족이나 다른 문화를 자연스레 수용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뉴욕에선 주민이나 여행객 사이에 이질감이 없다. 이런 요소들이 용광로 도시 뉴욕의 특징이고 매력 아닌가 생각한다. 뉴욕은 수많은 인종 만큼이나 다양한 문화를 품고 있다. NY.COM에 따르면 뉴욕시 5개 자치구(맨해튼, 퀸스, 브롱스, 브루클린, 스탠튼아일랜드)에는 총 83개의 박물관이 있으며 맨해튼에만 32개의 박물관이 있다. 위키피다아 뉴욕시 박물관 목록에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같은 대형 박물관에서 부터 개인의 컬렉션을 전시하는 조그만 전시관, 유대인 박물관, 중국 박물관 같은 민족 박물관과 비영리 아트 갤러리, 아트 센터 등 230여개의 각종 박물관을 열거해 놨다. 뉴욕을 찾는 수천만 명의 관광객들이 순례지처럼 방문하는 곳이 맨해튼 5대 박물관이다. 센트럴파크를 사이에 두고 동쪽에는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이 있고, 서쪽에는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1870년 만들어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전 세계의 예술 작품 200만개 이상을 소장한 세계 최대 규모다. 5번가(5th Ave)를 따라 82가에서 110가 사이 '뮤지엄 마일'(Museum Mile)에 9개의 박물관이 있다. 뉴욕의 5대 박물관 중 하나인 구겐하임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센트럴파크 서쪽에 있는 자연사박물관은 외국인들도 방문해 볼 만한 곳이다. 피카소, 달리, 마네, 모네, 마티스, 폴락, 워홀 등 문외한들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거장들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어 있는 세계 최고의 박물관 MOMA(Museum of Modern Art)는 관광객들의 필수코스다. 항공모함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인트레피드 해양 항공우주 박물관(Intrepid Sea, Air and Space Museum)을 포함해 뉴욕의 5대 박물관이라고 한다. 맨해튼에는 이렇게 대규모의 유명한 박물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내 곳곳에 세계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들이 산재해 있다. 섹스 박물관(Museum of Sex)도 그중 하나다. 맨해튼 한인타운이 있는 32가에서 동남쪽으로 서너블럭 내려가면 2002년 10월 5일 개장한 '섹스 박물관'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미성년자 관람불가로 만 18세 이상의 성인만 입장할 수 있다. 1층은 기념품 가게로 각종 성과 관련된 기구, 기념품, 서적 등을 판매한다. 2층부터는 전시장이다. 전시실에는 각종 그림과 사진 그리고 온갖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부부, 친구, 애인들이었다. 오히려 여성 관람객이 많은 듯했다. 이 박물관이 위치한 곳은 19세기부터 1990년대 초까지 유흥가로 사창가, 술집 및 댄스홀 등이 밀집되어 있던 곳이다. 섹스 박물관 전시품들은 유능한 학자, 예술가 등이 제공하는 1만5000개의 유물들을 망라하고 있다. 인간의 섹슈얼리티의 역사, 진화 및 문화적 중요성을 보존하고 제시하며 다양한 문화, 시대 및 미디어의 자료와 유물을 전시하며 금기시되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영구 컬렉션 외에도 액션 섹스 앤 모션 이미지, 만화책, 동물의 성생활, 로봇 등 박물관의 수집은 자체 연구와 현대 미술의 추상적 개념을 통해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한다. 섹스 박물관은 뉴욕 대학의 성 연구 센터(Centre for the Study of Human Sexuality), 뉴욕 공공 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과 공동 연구를 한다. 섹스 박물관 행사는 뉴욕타임스, 뉴요커와 같은 간행물에 정기적으로 다루어지며 CNN, NBC의 여러 프로그램에 소개 되기도 한다. 이곳은 일반적으로 터부시하는 성행위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지식을 얻게 하는 독창적인 곳이다. 인간에게 섹스는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섹스를 해왔고 할 것인가? 섹스는 종족 번식 외에 인간다움을 증명하는가? 안전한 섹스는 무엇인가? 해법을 찾을수 있는 곳이다.

2019-09-03

상상과 현실 사이…사막속 '외계인 메카'

어렸을 적 국민학교도 다니기 전이었다. 동족상잔의 상처가 아물어가고 재건이 가속을 내던 시절이었다. 먹을게 모자라 동회 앞마당에는 미국의 원조식량인 옥수수와 분유를 배급받기 위해 긴줄을 서야했고 학교에서는 결식하는 애들이 많아 점심시간에 옥수수빵을 나눠줬다. 거칠고 딱딱한 옥수수빵의 구수한 냄새는 일품이었다. 이때 기억으로 미국에서도 가끔 콘브래드를 사먹지만 그때 맛을 찾을 수 없다. 어른들은 명절이고 생일이고 모이면 술안주로 육이오 전쟁(한국전쟁) 얘기를 했다. 연세드신 분들은 피난생활의 애달픔을, 전장에서 살아남은 큰형이나 삼촌들은 총알과 폭탄이 빗발치던 절대절명의 순간들을 얘기했다. 야간 매복작전에 인민군이 뒤에서 덮쳤지만 구사일생한 친척 형은 지금도 누구든 무엇이든 등뒤에 있는 걸 두려워했다. 늘 벽을 배경으로 앉아 있거나 했다. 나는 전생에 전장 경험이 있었는지 얘기만 들어도 전쟁은 공포스러웠다. 밤에 쌕쌕이 비행기가 멀리 지나가도 전쟁의 두려움으로 얼굴을 이불에 파묻으며 공포를 달랬다. 다시 전쟁이 나면 어떡하나 하는 우려는 중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 이후로는 전쟁공포증이 희미해졌다. 오히려 1, 2차 세계대전 비사, 태평양전쟁(미국과 일본의 전쟁), 한국전, 월남전 등 세계의 분쟁, 전쟁사를 책과 영화로 섭렵했다. 인간의 역사는 분쟁의 역사였다는 것을 각인했다.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정치적, 이념적, 종교적, 민족간의 갈등과 분쟁으로 잔인한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민족과 종교와 이념을 내세운 국수주의자와 독재자, 극소수 이익집단의 이기를 위해 분쟁을 일으킨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력을 장악하고 대중을 선동해 자신들만이 선택 받았다고 주장하고 쇠뇌하는 것이다. 국론이 분열되고 결집력이 약한 후진 민족이나 작은 나라는 물리적, 경제적으로 지배 당한다. 군사력과 경제적 강자만이 생존하는 양육강식이 적자생존이 되어버린 요즘이다. 2017년 나사(NASA)는 생명체가 살 가능성이 높은 지구와 매우 흡사한 크기의 행성 10개를 발견했다. 반신반의하던 UFO와 외계인의 실체, 외계인의 지구침투가 염려된다. 21세기 세계 최강의 국력을 가진 미국에는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비밀과 극비장소들이 많다. 일반인들에 공개되지 않는 비밀들은 대개 국가안보나 세계평화를 가장하고 숨겨져 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북서쪽으로 120마일 가량 떨어진 네바다주 사막 한가운데 51구역(AREA 51)이라는 1급 비밀 군사기지가 있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그룸 호수 공군기지(Groom Lake Air Base)다. 서울의 두 배에 육박하는 시설이 구글 맵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고 접근, 촬영, 취재금지가 되어 있는 삼엄한 곳이다. 51구역 군사기지는 외계인이나 UFO 연구를 수행하는 곳이며 지구에 추락한 UFO 잔해를 보관 중이거나 외계인과 공동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확인 할수 없는 얘기들이 떠돈다. 이 지역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UFO같은 정체불명의 발광 물체가 출몰하거나 의문의 굉음이 울린다고 말한다. 세계 도처에서 UFO와 외계인을 만났다는 수많은 기록과 증언들이 있다. 선사시대 벽화에도 UFO와 외계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현재의 인류의 기술력으로도 만들어 낼수 없는 대규모이거나 정교한 고대 유물이 많다. 불가사의한 유물들은 외계로부터 기술을 전수 받았거나 외계인들이 직접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외계 지적 생명체가 지구를 방문 했거나 지배했을 증거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2010년 세계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박사가 다큐멘터리 '스티븐 호킹의 우주'(Stephen Hawking's Universe)를 만들며 외계인이 확실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는 "침팬지가 양자이론을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의 뇌로 생각할 수 없는 지능적인 생명체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구에 사는 인간을 만나러 오는 외계인을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한 크리스토퍼 콜롬부스에 비유했다. 인디언들에게 외계인 격인 콜롬부스가 인디언들을 살상하고 문명을 파괴 했듯이 외계인의 지구 침략은 재앙일수 있다고 경고했다. 할리우드 공상과학 영화는 외계인과 어린이들이 우정어린 교류를 하는 친근한 이미지의 외계인을 그리기도 하고, 외계인의 지구침략을 영화로 만들어 상업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베일에 가려져 있는 네바다주 51구역 그룸 호수 공군기지는 철저한 보안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 공군기지는 U-2 정찰기나 SR-71 블랙버드, F-117 스텔스기 등 미군의 최첨단 무기를 극비리에 테스트하는 곳이라고 한다. 라스베이거스를 출발해 95번 국도를 타고 데스 밸리 방향으로 가면 아말라고사 밸리(Amaragosa Valley)가 나온다. 이곳이 그룸 호수 공군기지로 가는 사막교차점이다. 이곳에 '51구역 외계인 센터(Area 51 Alien Center: 2711 US-95, Amargosa Valley, NV 89020)'라는 곳이 있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사막길을 수십마일 운전해 간 보람도 없이 51구역 외계인 센터에 들어가는 순간 기대가 실망으로 변한다. UFO와 외계인을 캐릭터화해 각종 기념품을 만들어 파는 상점 겸 음식점이었다. 지구인들이 우려하는 만큼 UFO와 외계인에 대한 지식과 대처법을 배울 수 있는 외계인 박물관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2019-08-27

100년 전 광석타운이 이젠 '유령타운'으로

그가 한 번 노하시니, 땅은 뒤흔들리고, 하늘 기초도 뒤틀리며 흔들렸다. 코로는 연기를 내뿜으시고, 입으로는 불을 토하시며, 숯불처럼 모든 것을 살라버리셨다. 그는 하늘을 밀어 젖히시고, 검은 구름 위에 내려 서시며 거룹을 타고 날으시고, 바람 날개를 타고 내리덮치셨다. 몸은 어둠으로 감싸시고, 비를 머금은 구름을 두르고 나서시니, 그 앞에선 환한 빛이 터져나오며 짙은 구름이 밀리고, 우박이 쏟아지며 불길이 뻗어났다. 지극히 높으신 이, 야훼께서 천둥소리로 하늘에서 고함치셨다. 번개는 번쩍번쩍, 화살을 마구 쏘아대시어 원수들을 흩어쫓으셨다. 야훼께서 한 번 호령하시니, 바다 밑바닥이 드러나고 그의 콧김에 땅의 기초가 드러나는데··· ? 구약성서 '사무엘하 22장'에 나오는 이 글은 당시의 산토리니 화산이 폭발한 모습이다. 산토리니 화산 폭발은 B.C.1400년경에 크레타 섬 북쪽 12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산토리니(Santorini), 현재 티라(Thira)섬 화산이 대분화를 일으켰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화산 폭발은 산토리니 섬을 중심으로 에게해의 섬들과 크레타 섬이 붕괴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 아더 에번스(Arthur Evans)에 의해 크레타 섬 발굴이 시작되고 미노아 문명의 실태가 점차 밝혀졌다. 도자기, 벽화 등 수준 높은 물건들이 출토되었고 전성기에 인구가 5만 명에 달하는 지중해 동부 최대의 도시였음을 추측하고 있다. 철학자인 플라톤이 약 2500년전에 저술한 '크리티아스'에서 지상낙원 사라진 아틀란티스를 상세히 소개했다.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한 플라톤의 이야기는 모두 상상에 의해 꾸며진 것이라고 플라톤이 살아 있을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다. 학자들은 산토리니 화산 폭발에 파묻힌 미노아 문명의 크레타 섬을 하룻밤새 재난으로 대양 속으로 가라앉은 아틀란티스의 창이라고 조심스런 가설을 내기도 한다. 아틀란티스는 대서양에 실재하였으며 유럽보다도 큰 대륙이었고 그들의 역사는 기원전 20만 년 전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문명은 매우 높은 수준으로 전자공학은 극한까지 발달했었는데 아틀란티스가 멸망한 것은 레이저 광선을 연상시키는 엄청난 에너지원이 폭발해 초고대 문명은 흔적도 없이 바다로 사라져버렸다고 전한다. 지구 46억년의 역사를 하루 24시간으로 보면 인류 24만년 역사는 30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니 지구의 미스테리는 무궁무진 할수 있다. 지금도 아틀란티스의 이야기는 공상과학 소설, 영화, 문학의 소재가 되고 있다. 우리는 도시를 덮은 콘크리트 구조물과 고층건물들 아스팔트 도로 수많은 자동차와 문명의 이기들을 당연하게 접하며 살고 있다. 역사를 돌아보고 미래를 예측해보는 다큐멘터리 영화 '인류 멸망 그 후(Life after people)'를 봤다. 인류가 사라지고 서서히 변해가는 지구의 모습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보여주고 있다. 파괴된 텅빈도시가 정글로 변해가는 모습은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죽음의 계곡으로 향하는 데스 밸리 국립공원 동쪽 입구 사막에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놓은 유령도시가 있다. 유령도시 라이오라이트(Rhyolite)는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북서쪽으로 약 120 마일 떨어진 불프록 힐스(Bullfrog Hills)에 있다. 1904년 이곳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금보다 광석 매장량이 많았다. 샘플로 채취된 광석이 당시 가격으로 톤당 3000달러 정도의 값어치를 가졌고 현재 시가로 톤당 7만8000달러라는 높은 가격이었다. 순식간에 불프록 광산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불과 1년후 1905년에 라이오라이트의 인구가 2500명이 되었다. 1907년에는 무려 6000여 명으로 인구가 불어나며 콘크리트 도로가 건설되고 전기, 수도의 공급과 전화와 전신시설, 경찰서, 소방서, 학교, 기차역, 철도화물 창고, 세 곳 이상의 은행, 주식교환소, 오페라 하우스, 병원, 공용 수영장, 교회같은 시설들이 들어서고 일간지와 주간지를 발행하는 언론사도 보유한 활성화된 타운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런 영화는 얼마 가지 못했다. 1908년, 광산의 가치가 과대평가 되었다고 생각한 일부 투자자들이 영국으로부터 광산전문가를 초빙해 조사를 했다. 광산전문가의 비관적 평가에 광산의 값어치는 급격히 감소했다. 1911년에는 유리,도자기 등의 원료로 사용되는 이 지역 주요 광물인 유문암(Rhyolite)마저 매장량이 줄자 급기야 광산이 문을 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살길을 찾아 흩어졌다. 사람들이 떠나며 그동안 건설되었던 많은 시설들은 근처의 비어티(Beatty)로 이전을 하게 되었고 라이오라이트는 순식간에 유령 마을로 전락하게 되었다. 도시나 마을도 흥망성쇠가 있어 부흥하기도 하고 망해 없어지기도 하지만 순식간에 도시가 만들어져 6년여 만에 사라져버린 경우는 라이오라이트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엔 영원한게 없다. 우리는 이땅을 잠시 빌려 살다 떠나는 유한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며 사막에 뼈대만 남아 황량한 비현실적인 풍경을 연출하는 거리를 걸었다. 1907년 7월 4일 시간을 고정해 놓은 안내판 사진속 희망에 젖어 이 길을 메웠던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2019-08-20

사막의 아름다움과 생명력 품고 있는 절경들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와 우연히 만난 어린 왕자가 사막 어딘가에 있을 샘을 찾아나섰다. 어린 왕자가 비행사에게 말했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비행사는 "집이건 별이건, 사막이건 그들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야!"라고 화답했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의 내용이다. 생텍쥐페리의 잠언들은 감동으로 다가와 여운을 남기며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사막 같은 삭막한 현실을 살아가며 희망과 사랑 등 소중한 것을 망각한다. 비행사와 어린 왕자가 사막에서 샘을 발견했듯이 소중한 것은 의외로 가까이 있다는 메세지다. 데스 밸리는 덥고 메마르고 황량해 죽음이 연상되지만 사막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품고 있는 곳이다. 데스 밸리는 어린 왕자가 심안으로 샘을 찾듯 물질과 욕망, 이기심과 허영심에서 벗어나 겸허해질 수 있는 곳이다. 데스 밸리 국립공원(Death Valley National Park)은 말그대로 극한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이 지역은 대부분이 바다 해수면 보다 낮은 지역이다. 퍼니스 크릭의 샘물이 흘러 오아시스를 형성해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았고 현재도 인디언들이 거주하고 있다. 퍼니스 크릭 지역의 주요 관광지는 남쪽의 배드워터를 중심으로 179번 도로 일대와 남동쪽의 단테스 뷰(Dante's View) 중심의 190번 도로 지역으로 나뉘어진다. 데스 벨리 여행시 주의점과 안전수칙 1. 데스 밸리 국립공원 내 동, 식물은 물론 화석이나 돌을 가져가거나 훼손하면 자연보호법에 저촉된다. 2. 오토바이, 자전거를 포함한 모든 차량이 도로 밖으로 벗어나는 것이 불허된다. 3. 덥고 건조해 탈수현상이 쉽게 일어난다. 따라서 1인당 하루 1갤런의 물을 준비해야 한다. 하이킹에 나설 경우라면 보다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하다. 4. 모자와 선글래스, 여름옷과 재킷를 함께 준비하는 게 바람직하다. 5. 여름철 기온이 높을 때는 소금밭이나 해수면 보다 낮은 지대로 들어가지 않는게 좋다. 6. 주변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 정차할때 갓길이 모래밭인 관계로 급정거는 절대 피해야 한다. 7. 길이 좁고 급커브길이 많으므로 과속은 금물이다. 4륜자동차 아니면 비포장 도로에 들어가지 않는게 좋다. 8. 에어컨 사용은 가급적 자제하고 엔진 과열을 조심해야 한다. 엔진이 과열됐을 경우에 주차해 놓고 엔진을 켜놓은 상태에서 열을 낮추어야 한다. 9. 여행 적기는 10월에서 4월까지이다.

2019-08-13

죽었지만 아직 '살아있는' 계곡을 향해

이름도 무시 무시한 '죽음의 계곡'를 가기로 했다. 아내는 덥고 물이 없어 생명이 살수 없는 사막이 두렵다고 했다. 내키지 않는 표정과 무거운 발걸음으로 따라 나섰다. LA를 출발해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15번 프리웨이를 타고 북상했다. 베이커(Baker)에서 방향을 틀어 127번 국도로 접어들면 풍경은 본격적인 사막을 연출한다. 60여 마일 지나 쇼손(Shoshone) 마을에 내려 기지개를 편다. 손바닥 만한 마을의 마켓 겸 주유소는 죽음의 계곡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명의 이기가 있는 곳이다. 비싼 기름값에 놀라지만 울며 겨자먹기로 꾹꾹 눌러 기름을 채운다. 쇼손 마을 인근 차이나 대추야자 농장(China Ranch Date Farm)의 말린 대추야자를 한봉지 사들고 출발했다. 차창을 확짝열고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마시며 질리지 않는 달콤한 대추야자를 입에 넣고 운전해 간다. 쇼손을 출발해 몇마일 지나 해수면 보다 282 ft(86 m) 낮은 배드워터(Badwater Basin)와 용광로 같이 무더운 퍼니스 크릭(Furnace Creek)이 있는 죽음의 계곡으로 향하는 178번 도로로 갈아탔다. 60여 마일의 오르락내리락하는 산길을 따라 가노라면 지형에 따라 변화무쌍한 풍경들을 만난다. 지난 겨울 데스 밸리에도 강수량이 많았나 보다. 4월들어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풀한포기 자라기 힘들것 같은 사막에 듬성 듬성 이름모를 들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차를 세워 풀한포기라도 밟을새라 조심조심 다가가 한참을 관찰했다. 비로서 내 아내는 활기찬 사막의 생명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경이롭게 바라본다. 호사가 있으려는지 호랑나비가 날고 노랑나비, 흰나비도 눈에 띤다. 세상에는 보이는 것보다 볼수없는 것이 더 많다. 가시광선에 의해 볼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물리적 공간속 흐르는 시간의 단면을 보지만 나의 뇌에 기록된 잔상에는 감성과 의식의 이면이 내재 되어 있다. 어쩌면 나의 눈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에서 초자연적인 영적차원의 다른 세계도 포착했는지 모른다. 사막에 흰나비가 훨훨 날아가는 물리적 풍경에 영적 상상을 얹어 본다. 멀리 떨어져 임종을 지키지 못한 못난 아들에게 흰나비의 모습으로 환생해 애틋함을 전했던 어머니의 초자연적 현상이 겹친다. 사막의 흰나비는 그리운 어머니였는지 모른다. 데스 벨리 여행의 적기는 11월부터 4월이 좋다. 꽃피는 데스 밸리의 4월은 세상에서 제일 경이롭고 아름다운 곳이다. 4월중순이 되면 더워가 스물스물 땅을 뚫고 올라온다. 여름이 되면 용광로 같은 더위가 살인을 할수도 있다. 1913 년 7월 10일 오후, 미국 기상청은 데스 밸리(Death Valley) 퍼니스 크릭(Furnace Creek)에서 섭씨 56.9 도(화씨 134도)의 고온을 측정했다. 이 온도는 지구 표면에서 기록 된 가장 높은 대기 온도다. 데스 밸리 여러곳의 볼거리가 몰려 있고 국립공원 방문자 센터가 위치한 곳의 지명이 퍼니스 크릭(furnace creek)이다. 데스 밸리의 배드 워터 분지 (Badwater Basin)는 북미에서 가장 낮은 해발 고도 (해발 282 피트, 86m)의 지점이다 퍼니스 크릭이 있는 배드 워터 분지는 북미에서 제일 높은 휘트니 산(14,505 피트: 4,421m)에서 동남쪽으로 84.6 마일 (136.2km) 떨어져 있으며 데스 밸리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텔레스코프 봉우리(Telescoope Peak 3,643 피트:3,366 m)사이의 협곡이다. 높은 산에 둘러쌓인 분지에 공기가 덥혀져 빠져 나가지 못하고 계속 덥혀져 용광로 더위가 되는 곳이다. 데스 밸리는 알래스카를 제외한 미국의 모든 국립공원 중 제일 면적(5270제곱키로, 남한면적의 1/7)이 넓다. 1848년 갤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 근처에서 금이 발견된 후 이듬해에 8만 명가량 일확의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1849년 겨울 약 100대의 포장마차가 솔트레이크 시티를 출발해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1849년 12월 25일에 그 중의 한 집단이 눈덮힌 시에라 네바다 산맥(Sierra Nevada Valley)을 넘지 않고 지름길을 찾아 들어간 곳이 데스 밸리였다. 여자들과 어린이들도 포함된 이들은 데스밸리를 빠져나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기진맥진한 데다 식량도 거의 떨어진 그들은 퍼니스 크리크 근처에서 야영을 했다. 스무 살인 윌리엄 맨리와 존 로저스가 도움을 구하러 2주 동안이나 걸어 로스앤젤레스 북쪽 샌퍼낸도에 도착했다. 물자를 공급받고 일행이 있는 데스 밸리로 25일만에 되돌아 왔다. 맨리와 로저스 덕분에 혼자서 야영지를 떠났던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살아남았다. 이곳을 떠나면서 한 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죽음의 계곡이여 안녕(Good bye, Death Valley)"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 이곳을 죽음의 계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데스 밸리에는 약 9000년 전부터 원주민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쇼쇼니족 인디언(Timbisha Shoshone)들은 1000년이 넘게 이곳에서 살아오면서 식물들을 먹고, 그 식물들로 가재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다. 지금도 퍼니스 크릭에 인디언 마을이 있다. 데스 밸리는 약 800만년 전에 생성된 호수에 바닷물이 증발해 소금밭이 된 평균기온이 화씨 120도를 넘나드는 척박하고 황량한 곳이지만 1000여종의 식물과 전갈 ,독거미, 방울뱀, 코요테, 매, 메추라기 도요새 등 수많은 동물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경이로운 곳이다. 데스 밸리 동물들은 날씨가 몹시 덥기 때문에 주로 밤에 활동을 한다. 데스 밸리는 모짜르트의 진혼곡 같이 무겁고 어둡기 보다는 비발디의 봄같이 생명의 기운이 샘솟는 곳이다.

2019-08-06

지친 삶이 쉬는 '위로의 오아시스'

온천장 한인들이 약간의 무거운 표정으로 김씨의 트레일러 앞에 모였다. 김씨는 일주일전 몇몇 친하게 지내는 캠핑장 이웃들과 사막 오지생활을 위로하려는 듯 70마일을 달려 라스베이거스 뷔페식당을 갔다. 밥상머리에서 가슴이 답답해오며 어지러웠다. 심장병 전력이 있던 김씨는 직감적으로 심장이상을 느끼고 즉시 911에 연락해 병원으로 실려갔다. 사막 온천장에서 심장발작을 겪었다면 병원으로 이송하는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생사를 장담할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큰도시에서 심장이상이 생긴게 천운이었다. 막힌 심장혈관에 스텐트(Stent·혈관 폐색을 막기 위해 혈관에 주입하는 것)시술을 하고 생명을 구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김씨가 아들차에 실려 테코파 온천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LA집으로 가기위해 주섬주섬 짐정리를 하는 사이 사람들이 모였다. 넉살 좋은 김씨는 우수개 소리를 연발했지만 캠핑장 노인들은 그늘진 얼굴로 한마디씩 덕담을 했다. 김씨 부부가 아들차에 올라 손을 흔들며 시선을 돌렸다. 자동차는 김씨 일행을 싣고 LA를 향해 서쪽 빈도로를 달려 나갔다. 시간은 금새 김씨네 자동차를 지우고 낯익은 사막풍경을 연출했다. 4월로 접어들며 이렇게 한 늙은 부부가 캠핑장을 떠났고 인사만 나눴던 캐나다 알버타주에서 내려와 겨울을 지낸 캐나다 한인 부부는 철새처럼 말 없이 떠났다. 캐나다 부부의 웃는 모습과 꼭 닮은 순둥이 검은 세퍼트가 머리를 스쳐간다. 떠날 시기를 경고하듯 4월들어 스물스물 더위가 올라오더니 90도가 넘는 날이 이어졌다. 어제는 세찬 바람이 밤새 불더니 RV 타이어 커버를 벗겨 맨발이 되었다. 결국 타이어 커버 네짝중 한짝은 바람을 타고 사막으로 종적을 감췄다. 일기예보는 다음주 사막폭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건너펀 RV캠핑장 박씨 부부는 겨우내 사용하던 짐을 정리하며 옮겨갈 짐을 픽업트럭에 싣고 있었다. 지나는 내게 작별 인사 대신 투박한 말투로 날씨 푸념을 했다. 이렇게 해서 길게는 서너달을 머물다 떠난다. 캠핑생활도 인생살이 같이 생기사귀(生寄死歸)다. 잠시 머물며 고단했던 삶을 돌아보고 추스리고 위로해 돌아가는 것이다. 80의 세월이 무색하게 정정한 송선생의 새벽 하이킹에 따라 나섰다. "해뜨기전 어둠이 깔린 오르막 경사진 도로를 걷는다. 사람에 놀란듯한 자동차가 속도를 줄여 지나간다. 한참을 걷다 도로를 휘돌아 메마르고 거칠어 발딛기 조차 조심스런 산길로 접어든다. 그사이 해가 뜨기 시작했는지 돌 언덕들이 다갈색을 하고 있다. 푸석한 잔돌이 박힌 산길을 따라 올라간다. 가파러 숨이 턱에 찬다. 앞서가는 이는 힐끔 뒤돌아 보고 멀리 앞서 나간다. 산중턱 7부 능선에서 숨을 돌린다. 붉은 아침해를 받아 울퉁불퉁한 속살을 들어낸 '죽음의 계곡'이 멀리 시야에 들어온다. 먼산 밑에 보기드문 몇채의 사막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어렴풋이 보이는 불빛에 온기를 느낀다. 불빛에 생명의 향기를 그리며 안도한다. 길게 이어진 능선을 따라 올라간다. 정상에 도달해 반대쪽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 아래 지평선에 목적지가 보인다. 잠시 돌무덤에 기대어 지나온 길을 되짚어본다. 시침마저 급했던 영원히 벗어날수 없을것 같았던 도시생활 이었다. 굴레를 이탈해 바람과 나무,물과 흙에 얹혀 살고 있다. 몸과 마음을 괴롭혔던 욕망과 갈등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불편하고 무심해서 행복한지 모르겠다. 길을 따라 간다." 우연히 한인타운 잡화점에서 테코파 김씨를 만났다. 다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테코파 온천은 테코파(Tecopa)는 캘리포니아 주 인요 카운티(Inyo County) 쇼쇼니(Shoshone) 마을의 남동쪽 약 9마일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 1339 피트다. 15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테코파는 파이우트(Paiute)추장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테코파 온천(Tecopa Hot Springs)이 유명하다. 유럽 자동차 여행객들의 미국 서부 여행 필수 코스이다. 이곳에는 캠프 그라운드와 RV 파킹장이 있고 모텔도 있다. 온천장은 인요카운티에서 운영권을 임차해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 있고 개인이 운영하는 곳도 있는데 캠핑이나 RV에 묵는 사람들에게는 온천장 이용은 무료다. 마을 입구에는 노천 온천탕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데 미국사람들은 남녀노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알몸으로 탕에 들어가기도 한다. 이곳에선 누드 온천이 자연스럽다. 테코파에서 쇼쇼니를 지나 몇마일 동쪽으로 가면 세계에서 제일 뜨거운 소금 사막 배드 워터(Bad Water)로 가는 데스밸리 국립공원 산길이 나온다.

2019-07-30

성공한 이민자 촌…매년 100만명 찾는 가주 명소

동북부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는 석탄과 석유, 철광석이 매장돼 있어 공업도시로 발전했다. 1800년대에는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가 철강제국을 건설했다. 카네기가 만든 피츠버그의 제철소는 공장과 철도에 철강을 공급해 미국 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미국 철강 생산의 3분의 2가 피츠버그의 제철소에서 생산됐다. 이 지역 초기 이민자들은 영국 등 앵글로색슨(Anglo-Saxons)족 출신들이었고 1800년대 중반에는 독일인과 아일랜드인이 이주해 왔다. 철강산업이 번창하자 1880년경에는 수천명의 동유럽과 남유럽 출신 이민자들이 피츠버그 제철소 노동자로 왔다. 피츠버그하면 전쟁의 지옥같은 참상과 인간성 피괴라는 전쟁 후유증을 그린 1978년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했던 베트남 전쟁 영화 디어 헌터(Deer Hunter)가 생각난다. 이 영화는 전쟁의 비극을 가감없이 보여주어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에 등장하는 월남전에 파병된 군인들은 우크라이나 이민자 후손들인 피츠버그 제철공장 젊은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여느 이민자 집단처럼 마을을 만들어 모여 사는 한동네 청년들이었다. 주인공들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고, 마을 사람들까지 전쟁의 상처에 고뇌한다는 내용이다. LA에 전세계에서 제일 큰 코리아타운이 있듯이 이민의 나라 미국은 시골, 도시를 막론하고 마치 원시 씨족사회처럼 같은 민족,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끼리 모여 산다. 미국의 이민 역사는 17세기에 약 17만 5000명의 영국인이 북미로 이주를 하면서 시작됐다. 영국 식민지 시대를 거쳐 18세기까지 미국으로 온 유럽 이민자의 절반 가량은 농장의 일꾼들이었다. 19세기 말부터 북유럽, 동유럽인 순으로 유럽 이민자가 들어왔다. 북유럽, 동유럽 이민자들이 오기 전까지는 영국과 서유럽 국가 출신 이민자들이 이민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1907년 한 해에만 무려 130만명 가까운 동유럽 이민자들이 몰려와 1910년에는 이민자 인구가 1300만명을 넘어섰다. 이민자가 급증하자 1924년 개정 이민법을 만들어 동유럽인, 유대인, 이탈리안, 슬라브 민족의 이민자 수를 제한했다. 1965년 이후에는 1882년 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으로 막혔던 동양인과 남미인들에 이민문호가 개방되었다. LA에서 북서쪽으로 120마일 가량 떨어진 샌타바버러 카운티에 인구 5500여명의 소도시 솔뱅(Solvang: Sunny Field)이 있다. 솔뱅은 덴마크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덴마크 마을이다. 1800년대 말 미네소타주로 이민왔던 덴마크인들 일부가 추위를 피해 1911년 캘리포니아에 땅을 구입해 따뜻한 곳(Solvang)이라 이름짓고 덴마크인 공동체를 설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640년대에 뉴암스테르담(현재 뉴욕)의 인구는 1000명이었는데 그중 절반이 덴마크인일 정도로 초기 북아메리카 식민사에서 덴마크인들의 활약은 적극적이었다.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의 심복이었던 한스 페비게르(Hans Christian Febiger, 1749-1796)는 덴마크계였다. 1860년부터 1930년까지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덴마크인 30만명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덴마크의 이주민은 유타, 위스콘신, 일리노이, 미네소타, 아이오와, 네브래스카, 사우스다코타주에 정착했는데 덴마크계 미국인 숫자는 2009년 인구조사로 151만 6126명이다. 덴마크인들은 민족성이 강해 정착하는 곳마다 루터교회와 민족학교를 세워 덴마크어를 가르치고 정체성을 확립했다. 1911년 솔뱅에도 루터교회와 민족학교를 만들어 언어와 춤과 노래 등 민족문화를 교육했다. 그러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민족주의가 팽배해지며 덴마크어 사용이 금지되었다. 2차대전 이후 미국 민족주의가 수그러들면서 덴마크풍 스타일의 목조건물을 짓고 풍차를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해 1년에 100만명이 찾는 명소로 발전했다. 지금도 덴마크 타운 솔뱅 루터 교회는 크리스마스 예배를 덴마크어로 진행한다. 마을 입구에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동상이 있는 미국 속의 유럽 덴마크 타운 솔뱅은 성공한 이민자 마을이다.

2019-07-23

캠핑카 탄생 100여년…미국인 25%가 즐긴다

미국은 캠핑문화가 발달되어있고 장비와 제반 시설도 잘되어 있다. 미국에는 1만3000개 이상의 개인 소유 RV 파크(캠핑장)와 1600개 이상의 국립, 주립 캠핑장이 있다. 미국에서 캠핑이라고 하면 대부분 캠핑카(Recreational Vehicle)나 트레일러(Trailer)를 이용한 오토캠핑을 의미한다. 캠핑카와 트레일러는 침대와 주방, 욕실이 갖춰진 움직이는 집이다. 캠핑장은 오폐수를 처리할 수 있는 시설과 전기와 상수도를 연결하는 시설이 되어있다. 그리고 테이블,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틀(fire ring), 공동화장실, 샤워실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다. 곳에 따라서는 놀이시설, 당구장, 수영장, 연회실 등을 갖춘 곳도 있고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캠핑장 이용료는 보통 일주일 머물면 하루치를 빼주고 한 달이면 2주치 정도를 받는다. 6개월을 머물면 저렴하게 캠핑장을 이용할 수 있다.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캠퍼들은 며칠 길게는 몇 달씩 묵는다. RV에서 사는 사람들을 풀타이머(Full Timer)라고 하는데 미국과 캐나다의 추운 지방 사람들이 겨울에 따듯한 애리조나, 플로리다 등 남쪽으로 내려와 길게는 6개월을 지내며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RV캠핑 생활을 한다. 이들을 일명 스노우 버드(Snow Bird)라고 칭한다. RV 산업협회(RV Industry Association)에 따르면 미국에서 풀타임 RV족으로 사는 사람들이 100만 명이 넘은 것으로 파악됐다. RV 소유 가구의 전형적인 가계 수입은 약 6만2000달러다. 이 가족들은 RV를 사용하여 매년 평균 4주를 보내며 RV 소유주의 약 54 %가 애완 동물을 데리고 있다. 2001년 이후 미국 RV차량 가구 소유가 16% 증가했는데 RV를 구입하는 주된 이유는 가족 중심으로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다. RV휴가는 호텔, 식사, 교통비 등 전형적인 여행에 들어가는 비용이 60 % 이상 저렴하다. 미국인 5명 중 1명은 RV캠핑과 관련된 하이킹, 트레킹 휴가를 선호한다고 한다. 조리와 숙박이 가능한 캠핑카는 미국에서 개발되었다. 캠핑카의 기원은 15세기 체코의 보헤미안 지방 집시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인도에서 넘어온 집시들이 마차 위에 집을 얹어 놓고 살았는데 바로 이것이 캠핑카의 시초이다. 최초의 캠핑카는 1908년 한 집시가 헨리 포드에게 부탁해 포드 자동차를 개조해서 캠핑카를 만들었다. 본격적으로 유행시킨 사람은 헨리 포드였는데 1913년 여름휴가때 캠핑카를 만들어 떠나면서 유행을 하기 시작했다. 100년 전 자동차의 대중화와 도로의 확장 탐험에 대한 미국인들의 열정이 캠핑카의 성장을 불러왔고, RV 산업이 태어나게 되었다. 1910년 미국에는 주유소와 포장도로가 거의 없고, 고속도로도 없었지만, RV(Recreational Vehicle)가 만들어졌다. RV 산업의 탄생이었다. 캠핑카는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주었고, 훌륭한 밤을 지낼 수 있도록 하였고 또한 홈쿠킹(home cooking)이 가능하도록 해줬다. 1930년대 만들어진 RV는 비행기에 쓰이는 알루미늄을 사용했으며 침대, 주방, 전기, 수도를 갖추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RV 산업은 이동성을 추구하는 미국인들의 증가로 번영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는 30피트의 고급스러운 모델이 등장하고 1959년에 이르러 차로 견인할수 있는 트레블 트레일러(travel trailer)가 선보였다. 수많은 오늘날의 RV제조 회사들은 1950년에서 1960년대에 생겨났다. 1970년대 이후 캠핑카는 전쟁과 평화, 호경기와 불경기, 사이버 혁명을 거치며서도 견뎌왔고 오늘날의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텍사스주 아마릴로(Amarillo)시는 1950년대까지 동서를 잇는 루트 66도로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40번 프리웨이가 지나가는 중부 대평원 팬핸들(Panhandle) 지역은 석유산업, 농업, 교통의 중심지다. 교통과 물류 중심지인 이곳에 잭 시세모어 RV박물관(Jack Sisemore RV Museum)이 있다. 트렌트(Trent)와 잭 시세모어 부자가 1974년부터 RV 대리점을 하면서 30년 전에 RV박물관을 개설했다. 이 박물관에는 1935년 홀만(Holloman)박사가 제작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에어스트림(Airstream) 토피도(Torpedo:어뢰)가 전시되어 있고 현재 2대가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회사로 유명한 앤하우저 부시(Anheuser Busch) 회사가 1921년 만든 램스티드 캠프카(Lamsteed Kamkar)가 전시되어 있다. 그외에도 50년대부터 70년대의 희귀하고 진귀한 캠핑카들이 복원되어 전시되고 있는 역사적인 곳이다. 매해 여행을 한다는 잭 시세모어 RV박물관장의 아들 트렌트는 "인간은 모험을 즐기기 위해 끊임없이 이동한다. 여행은 영혼을 일깨워준다. 캠핑카는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발전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잭 시모어 RV박물관은 향수에 젖어 옛길을 달려보는 루트 66(Route 66) 여행에 의미를 더할 수 있는 곳이다.

2019-07-16

버스형 클래스 A는 각종 주거용 편의시설 갖춰

뉴올리언즈 다운타운에서 북동쪽으로 10여마일 떨어진 허름한 캠핑장에 일주일 가량 머물고 있었다. 가격이 적당한 도심 외곽에 있는 허름한 RV캠핑장이었다. 개인이 운영하는 RV캠핑장은 보통 일주일을 머물면 6일치만 받는다. 24피트 길이의 작은 클라스 B(Class B) 캠핑카이지만 시내에 들어가기는 번거로워 택시나 우버를 타고 프렌치 쿼터를 구경하고 다녔다. 2017년 2월 7일 오전 비바람이 멈추면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 지역을 돌아보려 채비를 하며 여느날 처럼 로컬 TV 방송과 스마트폰 날씨 앱을 통해 일기를 확인하고 있었다. 방송에서 갑자기 우리가 있는 지역에 토네이도 주의보를 발령하고 낮은 곳으로 피해 엎드리라고 했다. 토네이도 경보가 내려지고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하늘이 어두워지며 강한 회오리 바람이 차를 덮쳤다. 차가 마치 공중부양하듯 살짝 떴다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피할수조차 없었던 순식간에 벌어진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 대자연 앞에선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가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토네이도의 중심이 지나간 캠핑장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가벼운 드래블 트레일러(Travel trailer)들은 회오리 바람에 말려 거꾸로 떨어져 있었고 엔진이 있는 무거운 버스형 캠핑카들은 다행히 쓰러지지 않고 외상만 입었다. 나의 작은 캠핑카는 천만다행으로 토네이도 중심에서 살짝 비껴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RV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연재해나 사고에 비교적 안전한 견고한 캠핑카를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3년 전 여행을 시작할 때 기동성과 경제성을 고려해 24피트(feet) 길이의 대형밴을 RV회사에서 개조한 클라스 B 캠핑카(Class B)를 타고 다녔다. 2년간 8만여 마일을 다니고 지난해에 기동성은 떨어지지만 주거성이 월등한 30피트 길이의 버스형 클라스 A RV로 바꿔 슬로 여행을 즐기는 풀타이머(Full-Time RV'er)가 됐다. 안전하고 편안한 버스형 캠핑카지만 단점도 있다. 길이가 길고 폭도 넓고 차고도 높아 운전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 버스형 캠핑카는 운행시 사각형의 생긴 모양대로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승용차를 매달고 다니면 프리웨이에서도 제한속도가 55마일이고 주차에도 제약이 따른다. 캠핑카 여행에 관심이 많은 지인들이 어떤 캠핑카를 구입해야 하는지를 질문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정답이 없다. 본인 스스로의 여행 스타일, 경제적 여건, 건강 등을 고려해 선택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RV산업협회(RV Industry Association)에 따르면 미국인은 평균 세번 RV를 바꾼다고 한다. 이 말은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여행 스타일이 바뀌기 때문일거다. 스태티스티컬 서베이(Statistical Surveys) 통계에 따르면, 2018년 미국의 RV 판매량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미국 가구 중 1050만 가구가 적어도 한 대 이상의 RV를 소유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RV를 구입한 사람들을 분석한 통계를 보면 60세 이상의 퇴직자 보다 밀레니엄 세대인 35-55세의 젊은층이 더 많이 구입했다. 미국의 평균 RV 소유자는 48세이고 약 4000만 명이 RV 캠핑을 즐기고 있다. 캠핑카 인구 4000만 명 중 밀레니엄 세대가 차지하는 비율이 38%에 달한다. 여유만 되면 하루라도 빨리 캠핑카를 이용해 인생을 즐기려는 젊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캠핑카를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RV의 분류와 종류를 간단히 소개한다. 각종 생활설비를 차내에 갖춘 차량을 한국에서는 캠핑카라고 부르고, 북미에서는 RV(Recreational vehicle) 또는 모터 홈(Motor Home)이라고 부르는데 유형과 종류가 많다. 캠핑카는 차대(chassis)와 크기에 따라 클래스 A, B, C로 분류한다.

2019-07-09

꿈ㆍ희망 품고 달렸던 미 대륙횡단 첫 도로

지난해 봄 루트 66(US Route 66)을 따라 서부로 향했다. 루트 66 길은 프리웨이가 만들어지기 이전 미 대륙의 동서를 잇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길이다. 루트 66을 따라 캘리포니아로 가기 위해 35번 프리웨이를 타고 텍사스주 댈러스를 경유해 북쪽 오클호마주 오클라호마시티를 향했다. 루트 66은 지도에서 사라졌지만 2003년 일부가 복원되었다. 넓고 곧게 뻗은 40번 프리웨이를 타고 서부를 향하다보면 중간 중간 나타나는 소도시에 복원된 루트 66과 옛 마을들을 만난다. 세월에 묻혀 폐허가 된 고스트 타운(ghost town)과 모진 세월을 견디고 여전히 건재한 마을이 이어져 있다. 루트 66은 오클라호마주 털사(Tulsa)에 원유가 발견되고 인구가 늘자 원활한 왕래와 산업수송을 위해 1926년 11월 26일 개통되었다. 이 길은 점차로 시카고에서 서부의 끝인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까지 연장되었고 총연장 2400여 마일의 최초 대륙횡단 도로였다. 1929년에 미국은 대공항에 휩싸였고 1930년대 초에는 업친데 덮친격으로 중부 대평원에 가뭄과 모래폭풍이 몰아쳐 황폐해졌다. 모든걸 잃은 농민들은 지독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고향을 떠나 루트 66을 따라 희망의 서부로 향했다. 존 스타인벡은 이 길을 따라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노동자들의 애환과 당시 사회구조적 모순점을 고발한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를 썼다. 루트 66은 50년대 중반 프리웨이가 건설되기 전 철도와 함께 미국의 동맥 역할을 하며 산업발전과 생활향상으로 미국의 새로운 문화을 창조해 냈다. 대공황을 극복하고 경제가 부흥하자 자동차 보급이 늘고 여유가 생긴 사람들이 이길을 통해 여행을 했다. 8개 주를 거쳐 아름다운 산, 강, 계곡과 평원이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는 루트 66은 희망과 자유와 모험의 상징이며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시켰던 길이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루트 66은 마더로드(Mother Road)라고 불렸고 메인 스트리트(Main Street)라고도 불렀다. 오클라호마시티에서 40번 프리웨이 서쪽방향으로 가다보면 루트 66의 흔적들이 나온다. 많은 길들이 40번 프리웨이에 흡수됐고 지방도로로 살아 남은 곳도 있었다. 오클라호마시티 서쪽으로는 오클라호마, 텍사스 팬핸들 평원(Panhandle Plains)이 이어진다. 오클라호마시티를 출발해 서쪽으로 110마일을 지나 서부로 향하는 길목에 오클라호마 엘크시티(Elk city)를 만난다. 이 곳에 1892년 4월 최초의 백인 이주민이 정착을 시도해 1901년에는 목장과 농장이 생겼다. 엘크시티는 1902년에는 인구가 1000명으로 늘어났다. 1904년 철도가 놓이면서 오클라호마주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1930년대 루트 66이 개통되면서 엘크시티는 주요 교통 및 상업의 허브로 성장했으며 대평원 지역의 붐 타운이 되었다. 이곳에는 루트 66이 번성하던 시절의 도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대규모의 내셔널 루트 66 박물관(National Route66 Museum)이 있다. 이 박물관에는 50년대의 마을 모습이 재현되어 있고 희귀한 역사적인 문서와 수많은 인공물과 그 시대 부의 상징이기도 했던 캐딜락 앤티크 자동차등 30년대에서 50년대의 생활상을 살펴볼수 있다. 풍차, 농기구 같은 오클라호마의 초기 농장 도구와 대장간도 재현되어 있어 마치 민속 박물관 같다. 엘크 시티 내셔널 루트 66 박물관은 격동의 세월을 이겨내며 퇴락했지만 과거의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어 추억을 돌이켜 볼수 있는 곳이다. 루트 66 관련 박물관은 8개주에 걸쳐 14군데 있다.

2019-07-02

차로 달릴 수 있는 끝없이 펼쳐진 해변 모래밭

1769년 7월 돈 가스파르 데 포르톨라가 이끄는 스페인 탐험대가 샌디에이고에 도착했다. 이들은 칼과 십자가를 들고 있었다. 군인들과 가톨릭 신부인 주니페로 세라, 건축 기술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탐험대는 바하 캘리포니아 로레토로부터 육로를 따라 북상하여 지금의 샌디에이고 지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요새와 성당, 주거지를 한울타리에 묶어놓은 정복 전진기지인 미션을 건설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주변의 인디언들을 개종시키고 농사를 가르쳐 이들을 착취해 식량을 생산했다. 샌디에이고 미션이 완성되자 프르톨라 탐험대장은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몬트레이(Montereyㆍ'왕의 산'이라는 뜻)를 향해 정복의 길을 나섰다. 엘카미노 레알(El Camino Real.왕의 길) 탐험에 프라이 후안 크레스피 신부가 동행했다. "나는 세라 주임 신부로부터 겨자씨를 하사 받고 탐험대 일행과 함께 몬트레이를 향해 출발했다." 하루 이동거리인 40마일 마다 미션을 만들었는데 적당한 미션 예정지를 발견하면 겨자씨를 뿌려 표시를 했다고 크레스피 신부는 일지에 기록했다. 1769년 9월1일 해안을 따라 북상을 하던 탐험대는 롬폭 지역을 지나다 강줄기를 발견했다. 강의 이름을 샌타마리아라고 지었다. 샌타마리아 강을 경계로 남쪽으로는 샌타바버러 카운티, 북쪽으로는 샌루이스 오비스포 카운티가 들어섰다. 크레스피의 기록에 의하면 1769년 9월 4일 바닷가 근처 인디언 부락 근처에서 야영을 했다. 바닷가에서 조개를 채취하던 추마시 인디언들은 이 장소를 피스모(Pismo)라고 불렀는데 이 바닷가가 지금의 피스모 비치다. 이후 멕시코 정부는 1840년, 호세 오르테가에게 이 지역을 불하했는데 오르테가는 포르토라 탐험대 군인으로 현지에 정착했던 호세 프란치스코 오르테가의 손자였다. 1846년 미국과 멕시코 전쟁 당시 멕시칸이 소유하고 있던 랜초 피스모(Rancho Pismo)지역을 미국 동부 모피상 아이작 스팍이 사들였고 스팍은 랜초 피스모를 다시 존 마이클 프라이스에게 팔았다. 프라이스가 1891년 마을을 만들어 현재의 피스모 비치 시티가 되었다. 피스모 비치는 물이 빠지면 자동차가 질주할 수 있는 고운 모래가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제일 긴 백사장이다. 그리고 피스모 비치에는 피스모 조개가 유명한데 이 대형 조개는 해변의 이름을 따서 명칭이 지어졌다. 피스모 비치는 LA한인타운에서 멀지 않아 휴양지로 친근한 곳이지만 한인들에게는 조개류를 마구잡아 멸종위기에 몰았넣는데 일조한 낯뜨거운 곳이기도 하다. 80년대만해도 물만 빠지면 주먹만한 크기의 피스모 조개를 그냥 주어 담을 정도로 많아 세계 조개 수도(Clam Capital of the world)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이후 무분별한 남획으로 캘리포니아 해변의 해삼이 그렇게 되었듯이 피스모 조개도 개체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지금은 채취면허(salt-water fishing license)를 사야하고 직경 4.5인치 이상 1인당 하루 10마리까지 채취를 허용한다. 십수년전 여름 LA 한인타운 모 교회에서 어린이를 포함한 20여명이 단체로 피스모 비치로 피서를 갔다. 교인들이 불법으로 1만여 마리의 고둥을 마구 잡다가 경찰에 발각되었다. 피스모 비치에서 불법 조개 채취로 벌금을 물었던 한인들이 있었으나 고둥 불법채취는 처음이었다. 주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이 잡았던 고둥을 바다에 다 풀어줬다는 교인들의 말이 석연치않아 자동차를 뒤져 숨겨놓은 아이스박스를 발견했다. 아이스박스에 새끼 고둥이 가득했다. 화가난 경찰이 고둥을 일일히 세게 했다. 1만3200여 마리에 달했다. 경찰관은 교인 4명에게 무면허 고둥 채취 혐의와 거짓말을 한 괘씸죄까지 리포트해 법원으로 보냈다. 당시 주정부는 고둥 한마리당 최고 3달러의 벌금을 물릴 수가 있어 벌금 합계는 4만여 달러에 달했다. 일부 한인들 중에는 캘리포니아 바닷가나 산과 들에서 불법 어획, 불법 고사리 채취 등으로 벌금을 물고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이유로 태평양 바닷가에는 한글로 된 경고문을 종종 발견할수 있다. 피스모 비치 관광안내소에 들러 조개채취와 낚시면허를 문의하면서 나도 모르게 낯이 뜨거워졌다.

2019-06-18

알래스카로 향하는 고래 이동의 길목

천둥벌거숭이 소꿉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과학자인 친구는 지난해 미 정부 연구소를 퇴직하고 은퇴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연주하고 학생을 가르치고 여행도 하면서 지낸다. 전화 속 친구의 목소리는 어릴적 추억들을 회상하는 듯 약간 들떠 있었다. 우연히 우리의 학창시절과 맞물렸던 유행가를 듣다 문득 내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단다. 아마 나를 과거에 얹혀 본인의 어린시절을 회상했을 게다. 70년대 중반 나의 학창시절은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던 독재시대였다. 휴강 휴교가 잦았고 다가올 군 입대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암울했었다. 그 시절 송창식의 '고래사냥'이 인기였다.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은 가요계와는 관련이 없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고 한다. 가사의 내용은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하니 애인도 떠났고 빠르게 지난 학창 시절을 아쉬워하는 내용이다. '고래사냥'은 한치 앞을 분간할수 없는 안개 낀 시대를 살던 젊은이들의 좌절과 불안한 삶을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 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 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간밤에 꾸었던 꿈의 세계는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나도 '고래사냥' 처럼 불안한 현실을 도피해 기차를 타고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를 잡으러 동해 바다로 떠났다. 동해 바다로 가는 완행열차는 서울의 동쪽 청량리역을 출발해 중앙선을 타고 경북 영주에 도착한 뒤, 영동선으로 선로를 바꿔 북동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태백산맥을 뚫고 동해안으로 향한다. 청량리역을 출발해 강원도 속초로 가는 3등 완행열차를 탔다. 방학을 맞은 야간열차는 젊은 청춘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야말로 콩나물시루였다. 초만원을 이룬 열차 안은 사람의 열기를 더한 지상의 더위로 무더웠다. 그러나 모두는 불평은커녕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것 만으로 들떠 있었다. 또래의 승객들은 빽빽한 객차 안 의자걸이에 걸터앉기도 하고 좁은 기차바닥에 앉아 통기타 반주에 '고래사냥'을 고래 고래 불렀다. 일행이 아니더라도 누구라 할 거 없이 유행가를 흥얼거렸다. 밤에 청량리역을 출발한 3등 완행열차는 밤새 철길을 달려 여명의 동해안을 끼고 지쳐 늘어진 청춘들을 깨운다. 부시시한 눈으로 차창 밖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혹시나 청춘의 고뇌를 달래줄 고래의 흔적을 찾았다. 신화처럼 숨쉬는 고래는 가슴에 살아 남아 그리움이 됐다. 오리건주 태평양 연안을 끼고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소도시들이 있다. 오리건 해안을 여행하면서 젊은 청춘을 달래주던 동해바다를 닮은 곳을 찾았다. 해뜨는 곳과 해지는 곳이 맞닿은 느낌의 바다였다. 오리건주 태평양 연안 중간에 위치한 뉴포트(Newport)시다. 인구 1만여명의 뉴포트는 오리건주 최대 어항이지만 고풍스럽고 서정적인 곳이다. 국립 해양 대기청(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NOAA) 연구선의 모향이며 해양경찰 기지와 NOAA 수산 과학센터, 해트 필드 해양 과학센터(Hatfield Marine Science Center)가 있는 해양연구의 보고이다. 뉴포트 주변 해변에서는 조개를 줍거나 산책을 할 수 있고 낚시면허를 구입하면 대게와 모래사장과 갯벌에서 조개류를 잡을 수 있다. 또한 이곳은 멕시코에서 새끼를 낳은 흑등고래 등 1만 8000여 마리의 고래들이 알래스카로 이동하는 길목이고 해안에 서식하는 고래도 약 200여마리로 추정한다. 사람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직접 관찰하기도 하고 해안에서 고래의 이동을 지켜 보기도 한다. 뉴포트는 1992년 '프리 윌리' 영화에 출연했던 범고래 '케이코'가 아이슬란드 고향으로 돌려보내지기 전 1998년부터 몇 년간 적응훈련을 한곳으로도 유명하다. 케이코는 1977년쯤 아이슬란드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생포되어 멕시코의 멕시코시티로 팔려가 고래 쇼를 하는 신세가 됐다. '프리 윌리' 영화가 흥행하자 동물보호단체를 중심으로 케이코를 영화처럼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풀에 갇혀 사육되면서 피부 손상, 소화불량, 근육 퇴화 등으로 야생에서 살 능력을 잃어버린 게이코는 뉴포트에서 1998년부터 2002년 여름까지 적응훈련을 거친 후 아이슬란드 바다로 공수됐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인간의 손에 길러졌던 탓에 6주 만에 노르웨이의 스칼비크만까지 1400km가 되는 거리를 헤엄쳐 되돌아왔다. 그리고 평생 혼자 수조 속에서 살다가 2003년 12월 12일 폐렴으로 27살(추정나이)에 숨졌다. 멀리서 대형고래가 숨쉬며 내뿜는 포물선을 바라보는 것은 감격스러운 경험이다. 고래가 있는 뉴포트의 바다는 고뇌와 방황으로 혼란스러웠던 젊은 날의 초상을 위로할 만한 곳이다. 고래가 지나가는 먼바다를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본다.

2019-06-11

RV 몰고 만 3년…관조하는 여행을 시작하게 됐다

2016년 6월1일 LA를 출발한 RV여행이 만 3년이 되었다. 미대륙과 알래스카, 캐나다를 포함해 동서남북으로 두번을 종횡단했다. 올해도 베이스 캠프 같은 LA인근에 한달여 머물다 북상하고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어디를 어떻게 가야하는지 물어본다. 여행을 떠나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모두 자기의 몫이다. 여행에 정도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여행의 목적과 방법이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는 자동차를 타고, 오토바이를 타고 단시간내에 최대한 멀리 다녀오는 사람들도 있고, 목적지 없이 무작정 나서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경치를 보러 다니고 어떤 이는 도시를 배회한다. 내가 만난 한인 여행자들은 고단한 세상살이의 시름을 달래줄 경치와 지친 육신을 포근히 감싸줄 어머니 품같은 온천을 찾아 다닌다. 그리고 맵고 짠 반찬에 된장, 고추장, 김치를 싸가지고 다니며 된장찌개와 고기 등 고향음식을 즐긴다. 버거운 이민살이에 한국의 정서가 그리워서다. 여행은 일상을 탈피해 새로운 곳에서 전혀 다른 삶의 방식과 문화를 만나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한다. 호젓한 산길을 걷거나 바닷가를 조용히 산책해도 행복을 느끼고 영혼의 자유를 얻는 듯하다. 여행은 반복적이고 긴장된 삶에서 벗어나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 여행은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를 성찰하게 한다. 덴마크의 한스 안데르센 작가는 "여행은 정신을 다시 젊어지게 하는 샘"이라고 했다. 나이 60이 되고 오랜 직장생활을 그만두어야 하는 시기에 접어 들었다. 퇴직은 간단한 물리적 행위이지만 개인적으론 인생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이다. 퇴직한다는 것은 결혼해 자식을 키우고 길들여진 긴 사회생활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퇴직은 심리적 박탈감만큼의 정신적 방황을 겪게 한다. 퇴직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막상 닥치면 공황상태가 된다. 퇴직 여행을 계획했다. 모든걸 정리하고 1년 정도 미국 전국을 돌아보고 다시 정착할 요량이었다. 퇴직 1년 전 LA교외의 집을 처분하고 나와 아내는 14년을 동고동락한 반려견 레이시를 데리고 신문사와 멀지 않은 LA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사하면서 삶의 흔적이 배어 있는 쌓이고 쌓인 짐들을 정리했다. 짐들은 당장 사용할 살림을 제외하고 줄이고 줄였다. 집착하는 만큼의 버리지 못한 짐들이 스토리지(짐 보관소)에 꽉찼다. 퇴직을 준비하며 여행 계획도 세우고 RV도 구입해 가까운 곳에 정차해 놓고 틈만나면 연습을 했다. 떠나기 두달 전 레이시가 15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퇴직을 하고 얼마 후 아파트를 비우고 짐정리를 했다. 기거할 집이 없어지고 이동하는 집 RV에서 살게 되었다. 미국사람들은 전문용어 아닌 전문용어로 풀타이머(Full Timer)라고 부른다. 여행 풀타이머가 되어 캘리포니아의 역사가 시작된 21개의 미션을 일일히 돌아보며 하루도 같은 곳에서 머물지 않고 북상했다. LA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얽매였던 과거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여행을 시작하고 1년간은 허탈감 때문인지 해방감 때문인지 하루 이상을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서둘러 다녔다. 어느 날은 고단한지도 모르고 500마일을 운전해 나갔다. 계획은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여행이다. 2년간 8만마일을 달리고 기동성이 좋았던 조그만 RV를 버스형 대형 RV로 바꿨다. 과거를 옭매던 스토리지의 짐마저 없애고 본격적인 풀타이머가 됐다. 버스형 대형 RV로 여행을 한다는 것은 기동성을 버리고 슬로 여행을 하는 것이다. 서두르지 않는 관조하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지나쳤던 사물과 풍경에서 새로운 것을 느끼기 시작하고 1년이 흘렀다. 첫해 여름 서둘러 지나쳐 아쉬웠고 지난 겨울 비 맞으며 1달 이상을 지냈던 오리건 해안가를 다시 찾기로 했다. 해무와 파도 구름 속의 태양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는 오리건 코스트는 지상낙원이다. 주민들의 성품도 환경과 풍토, 날씨의 영향을 받아 투박하지만 순하다. 1805년 북부 오리건 코스트를 탐험하던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의 클라크 대위가 캐논비치(Cannon Beach)를 처음 본 순간 "망망대해 앞에 펼쳐진, 내 눈으로 본 곳 중 가장 장엄하고 기쁨을 주는 경관"이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건초더미를 높이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캐논비치의 거대한 바위 헤이스택 록(Haystack Rock)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여름을 지내기로 했다.

2019-06-04

헐값에 사들인 광활한 땅의 지도 그렸다

컬럼비아강은 오리건주와 워싱턴주를 경계하며 태평양으로 흘러 들어간다. 강하구 태평양과 만나는 곳에 오리건주 최북단 아스토리아(Astoria)시가 있다. 아스토리아시 외곽 컬럼비아강과 맞닿은 영스 만(Youngs Bay) 숲속에 루이스와 클라크 일행이 서부 탐험을 하고 겨울을 지냈던 요새가 있다. 지금은 루이스, 클라크 국립 역사공원(Lewis and Clark National and State Historical Park)으로 조성해 보존하고 있다. 클랫솝 요새(Fort Clatsop)는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파견된 메리웨더 루이스(Meriwether Lewis)와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 )대위가 31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4000여 마일을 가로질러 1805년 11월7일 도착한 곳이다. 탐험대는 이곳에 통나무로 요새를 만들고 주변을 탐사하며 겨울을 보내고 봄기운에 로키산맥의 눈이 녹기 시작한 1806년 3월23일 그들이 출발했던 세인트 루이스로 되돌아 갔다. 오리건주 북서부와 워싱턴주 남서부에는 이들이 탐험을 하며 생활했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아스토리아시에서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10여마일을 내려가면 인구 6000명을 조금 넘는 작은 도시 시사이드(Seaside)가 나온다. 탐험대는 해안을 따라 이곳까지 탐사했다. 클라크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시사이드에 머물며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고 130여마리의 순록과 20여마리의 사슴을 사냥해 겨울을 지냈다. 또 이 지역의 식물, 물고기, 야생동물 등 자연환경과 인근 인디언들을 접촉해 그들의 외모, 생활습관, 거주환경도 면밀히 관찰해서 기록으로 남겼다. 탐험의 끝지점이었던 시사이드 해변에는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서있고 그들이 소금을 만들었던 지점에는 동판이 새겨져 있다. 미국은 1776년 독립 당시 대서양 연안에서부터 애팔래치아 산맥에 걸쳐 있는 13개 주로 이루어진 대서양 연안국가였다. 신생국가 미국은 1803년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주도하에 나폴레옹의 프랑스로부터 헐값에 루이지애나 땅을 사들였다. 프랑스는 1762년 영국과의 7년전쟁 패배 후 영국이 루이지애나 영유권을 요구할 우려가 커지자 스페인에 이를 양도했다. 1800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에 압력을 가해 이 땅을 다시 찾았다. 제퍼슨 대통령이 루이지애나가 프랑스에 양도 됐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프랑스에 루이지애나 땅 매입을 위한 특사를 보냈다. 나폴레옹 정부는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산토도밍고(지금의 아이티 지역)의 흑인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쓸데없는 땅을 팔아버리고 군비를 확보하자는 생각으로 루이지애나 전체를 1500만 달러에 매각했다. 프랑스의 탐험가 라 살(La Salle)에 의해 루이 14세를 기려 명명된 루이지애나 영지는 사실 그 누구도 땅의 넓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루이지애나는 당시 미국 영토의 두 배나 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현재의 아칸소, 미주리, 아이오와, 오클라호마, 캔사스, 네브래스카, 미네소타, 사우스 & 노스 다코타, 몬태나, 와이오밍, 뉴멕시코, 콜로라도, 텍사스를 포함하는 약 83만 스퀘어마일에 해당하는 광활한 땅이었다. 미국은 나폴레옹 정부에 한반도의 10배나 되는 거대한 땅을 인류 역사상 가장 황당한 가격인 1㎢당 7달러라는 헐값에 사들였다. 미국은 루이지애나 매입을 계기로 본격적인 서부 개척 시대가 열리며 대륙국가로 성장해갔다. 역사가 헨리 애덤스는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단정했다. 1800년대 초 오리건 지방은 러시아에 속해 있었고 캘리포니아 태평양 연안에서부터 로키산맥까지는 스페인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제퍼슨 대통령은 루이지애나를 사들인 이후 매입한 땅을 탐사하고 대륙을 관통하여 태평양까지 이어지는 교역로 확보를 선점하기 위해 서둘러 루이스, 클라크 서부 탐험대를 파견했다. 탐험대는 1804년 5월 14일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를 출발해 미주리 강을 따라갔다. 아이오와, 캔자스, 네브래스카, 사우스 다코타, 노스 다코타, 몬태나를 지나 로키 산맥을 넘고 워싱턴주를 횡단해 오리건 태평양 연안을 확인하고 1806년 9월 23일 복귀한 28개월의 여정이었다. 탐험대는 합법적인 땅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미 북서부 지역을 확인하고 약 140장의 정확한 지도를 그렸다. 이 지도는 로키 산맥 너머 오리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탐험대는 미시시피강 너머 알려지지 않았던 서부의 기후와 자연생태와 24개 인디언 부족들의 위치, 삶, 활동 그리고 문화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탐험대는 인디언들에게 제퍼슨 대통령의 은메달과 기념품을 선물하며 미국이 통치하는 지역임을 시사했다. '루이스와 클라크의 답사기'는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미국인의 서사시이다. 석양이 아름다운 오리건 북서부 태평양과 컬럼비아강 하구에는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2019-05-28

19세기 공장 개조…통조림의 역사 한자리에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여섯살 즈음이었다. 흐릿한 어린 기억에 손님들도 있었고 집안이 시끌벅적했었다. 집 마당 한구석에서 닭잡는 것을 목격했다. 60년대 초에는 마당이 있는 도시 가정집에서 닭을 잡아 요리를 하기도 했다. 닭국이 끓여졌고 누군가의 그릇에 닭머리가 있었다. 그 충격으로 트라우마가 생겨 이후로 닭고기를 못먹게 되었다. 나의 악몽은 닭에 관련된 꿈일 정도로 충격적 사건이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영양식이었던 70년대의 전기구이 통닭, 여름철 삼계탕, 요즘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한국식 양념닭은 언감생심이었다. #재작년 펜실베이니아주 랭캐스터(Lancaster)를 여행했다. 이곳은 더치 카운티(Pennsylvania Dutch County)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아미시(Amish)들이 현대 기술과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고 나름대로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집하며 살고 있는 곳이다. 아미시들은 자급자족 농업생활을 하며 집집마다 식량으로 사용할 소, 돼지, 양, 오리, 거위, 닭 등의 가축들을 넓은 마당 한울타리에 풀어 기른다. 보기에는 낭만적이지만 이 동물들을 필요에 따라 직접 도살한다. 내가 머물렀던 랭커스터 캠핑장 촘촘한 철조망 울타리 건너에 아미시 농장집이 있었다. 농장 안에는 농사에 동원되는 큰말들이 풀을 뜯으며 농한기를 즐기고 있었고 여느 아미시 농가처럼 닭도 놓아 길렀다. 어느날 내 RV차 뒤로 닭들이 모여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멀리서 조용히 동태를 살피니 중병아리가 캠핑장으로 넘어왔다 되돌아가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울타리 건너에 10여 마리의 닭무리가 걱정을 얹은 구구소리를 내며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였다. 애를 태우던 중병아리가 마침내 구멍을 찾아 넘어가자 닭무리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우리가 매일 먹다시피하는 한국식 양념닭들도 살아서는 꽤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동물인 것을 새삼 느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육식 애호가였다. 지난 여름 워싱턴주 대형마트에서 한국식 삼겹살을 발견했다. 한국음식이 그리운 탓에 기회만 있으면 삼겹살을 구해다 캠핑 화덕에 불을 피워 숯불구이를 했다. 불을 피우고 먼바다를 바라보며 아끼던 소주를 곁들인 삼겹살구이 시식은 천상의 행위였다. 그러다 어느날 왠지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같은 동물들의 선한 눈을 바라봤다. 과학자들은 포유류와 조류가 복잡한 감각과 감정을 지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먹고 있는 소, 돼지, 닭 등 동물들도 육체적 통증을 느끼는 것은 물론, 정서적 고통도 느낀다는 것이다. 아내에게 우유나 치즈, 계란은 먹지만 육식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여행을 하면서 한식을 고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한국식 생선구이나 생선찌개를 먹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미국 시골 마켓에는 아예 생선을 팔지 않는 곳도 많고 코리아타운 아니면 고등어, 꽁치, 삼치 같은 한국인들이 즐겨 먹는 생선을 구할 수 없다. #어항이 있는 바닷가 마을은 물론 미국 마켓 생선전 생선은 한정되어있고 그마저도 포를 뜬 살점만 판다. 궁여지책으로 통조림 생선을 먹기 시작했다. 지금은 질 좋은 생선 통조림이 있으면 사다 재어 놓는다. 오리건주 태평양과 컬럼비아강 하구가 접한 아스토리아시는 예전부터 유명한 어항이었다. 연어를 비롯한 생선의 어획량이 많은 곳으로 북유럽 출신 이민자들이 어업을 하며 일군 도시였다. 1899년에는 이 지역 어부들이 범블 비 해산물(Bumble Bee Seafoods) 회사를 만들어 참치, 연어, 정어리 등의 생선 통조림을 생산했다. 이 회사는 현재 북미에서 가장 큰 통조림 회사가 됐다. 아스토리아시 동쪽 39부두(Pier 39)에서 1875년부터 생선 통조림을 생산하던 오래된 통조림 가공 공장을 개조한 핸손 통조림 박물관(Hanthorn Cannery Museum)이 있어 관람했다. 이 박물관은 범블 비 통조림 회사와 전직 근로자들이 설립했다. 무료로 운영되는 박물관에는 오래된 통조림 가공기계, 통조림 가공전 참치를 저장했던 냉동실과 참치와 연어를 낚던 배와 장비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생선 통조림 산업과 노동 현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살아있는 오리건주 역사의 현장이었다. #얼마전 제2의 고향 LA를 방문해 지인들을 만났다. 육식을 안한다는 말에 모두 의아해 했지만 생선집으로 데려 가는 배려를 받았다. 폐를 끼치는 행동이 아닌가 자책도 해봤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말처럼 고기맛을 알면서 참는다는 것은 고역이다. 식생활이 무척 불편하지만 육식을 포기하면서 지능이 있고 육체적, 정서적 고통을 느끼는 동물을 먹는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2019-05-21

세계에서 가장 눈 많이 내리는 '웅장한 흰산'

내가 산에 가는 것은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행위였다 어릴 때 꿈으로 그리던 세상을 향해 내 순수의 시간과 영혼을 묻어두고 그 잘난 육신만 추슬러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비행기도 타고 꿈으로 그리던 그곳을 향해 기를 쓰고 다가갔지만 아! 그 게 아니었음을 깨닫자 묻어두고 온 영혼을 찾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이덕호 시 5번 프리웨이 오리건과 워싱턴주 구간을 달리다보면 만년설의 고봉들이 나타난다. 특히 시애틀 지역 멀리서도 보이는 레이니어산(Mount Rainier)은 사방에서 우리를 내려 보듯이 우뚝 솟아 있다. 달밤의 레이니어산은 신비해 보였다. 해안가를 따라 워싱턴주 북부로 올라가면 캐나다 국경을 접하고 베이커산(Mount Baker)이 마치 레이니어산을 흉내 내려는 듯 솟아 있다. 날씨가 흐리면 푸른 빛을 띠기도 하고 태평양으로 떨어지는 해를 받아 붉게 물들기도 하는데 올려다 보는 각도에 따라, 기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밝은 달밤의 베이커산은 영험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워싱턴주 버치베이에 머물며 캐나다에 사는 지인에게 연락을 했다. 지인은 한국에서 잘나가던 방송국 드라마 감독이었다. 그는 복잡다단한 고국생활을 뒤로 하고 산과 들, 꽃과 새가 있는 자연에 싸인 캐나다로 이민왔다. 하지만 그는 만만치 않은 이민생활에서 오는 중압감을 벗어던지려는 듯 매주 산행을 하고 있다. 그는 산행으로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권태를 떨구며 무아의 세계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매일 아침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베이커산을 마주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지인이 국경을 넘어와 베이커산을 안내했다. 이 곳은 한 여름에만 도로가 개방된다. 더구나 일기가 고르지 않아 산을 찾아도 산을 볼 수 있는 날은 일년에 한달도 안된다고 한다. 겨울에는 스키장이 개방되고 겨울등산 장비을 갖추면 산에 접근할 수 있다지만 만만치 않아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막 가을 옷으로 갈아 입기 시작한 맑고 밝은 베이커산이 우리 일행을 맞았다. 베이커산은 케스케이드 산맥(Cascade Mountains)의 봉우리다. 케스케이드 산맥은 알래스카 해안에서 시작되는 산맥의 가지로 밴쿠버 인근의 가리발디산(Mt. Garibaldi)에서부터 미국의 베이커와 레이니어산, 세인트 헬렌산(Mt. St. Helens)을 지나 캘리포니아까지 이어진다. 베이커산은 이 산맥의 북서단에 위치해 있다. 워싱턴주 벨링햄(Bellingham)시에서 동쪽으로 약 31 마일 떨어진 베이커산은 높이가 1만781피트다. 레이니어산과 베이커산은 캐스케이드 산맥(Cascade Range volcanoes)중에서 가장 두껍고 많은 빙하로 덮여 있다. 특히 베이커산은 세계에서 가장 눈이 많이 내리는 곳 중 하나다. 1999년 마운트 베이커 스키장에 내린 눈은 세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인디언들은 '웅장한 흰산(Koma Kulshan)'이라 부르며 수천년 동안 베이커산에 의지해 살았다. 1790년 743개의 섬들이 떠 있는 시애틀 앞 바다를 탐험하던 스페인 탐험가 곤잘로 로페스 데 하로(Gonzalo Lopez de Haro)가 선상에서 베이커산을 보고 처음 지도에 그려 넣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국 탐험가 조지 밴쿠버(George Vancouver)는 1792년에 태평양 북서부 해안에 도착했다. 후안 데 후카(Juan de Fuca)해협의 남쪽 해안에 정박하는 동안 조지 밴쿠버의 부하인 조셉 베이커(Joseph Baker)중위가 베이커산을 관찰하고 베이커산이라 이름을 붙였다. 1868년 8월 17일 영국인 에드먼드 콜맨 외 3명이 최초로 산정상을 정복했다. 이 지역의 무분별한 개발과 자연 훼손이 심각해지자 1984년 연방정부가 나서서 삼림 보호 지역으로 지정했다. 워싱턴주 542번 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베이커산을 향하는 경치는 절경이다. 산행 출발점인 아티스트 포인트는 주차 공간이 넓다. 주말에 날씨가 맑아서인지 주차장은 만원이었다. 9000여 피트 높이의 셕산(shuksan)산이 펼쳐져 있고 맞은 편에 베이커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웅장한 모습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지인은 베이커산의 여러 트레일 코스를 섭렵했는데 초보자도 쉽게 산행 할 수있고 풍경이 뛰어난 타미간 릿지 트레일(Ptarmigan Ridge Trail)을 추천했다. '산에는 마음이 있어 산 사나이의 보금자리 너 없이 못사는 사람은요 산 사나이 뿐이라오….' 산길을 걸으며 학창시절 산악캠핑을 하며 친구들과 불렀던 산노래가 흥얼거려졌다. 땀흘린 산행은 고단했던 삶의 흔적들을 투명하게 정화시켜 주는 듯했다.

2019-05-07

미국 속의 '작은 네덜란드'…정ㆍ재계에 막강 영향력

미국의 주류는 1600년대부터 미국의 동해안에 정착한 영국계(white anglo saxon protestant)이다. 반면 영국인에 차별받던 아일랜드인이나 독일, 동유럽의 유대인, 이탈리아, 폴란드, 러시아인들은 1800년대 중반이후 점차적으로 미국으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도시의 외곽이나 신개척지인 서부로 향해 삶의 터전을 개척해 나갔다. 유럽인들의 미국 이민이 늘자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인디언들이 사라진 광활한 남부에는 흑인노예를 부리는 탐욕스러운 백인들의 대농장들이 들어섰다. 남북전쟁 이후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군대를 보내 인디언의 땅을 빼앗았다. 1887년에는 도스법(The Dawes Act)을 통과시켜 인디언 땅을 강제적으로 줄여 철도회사와 새로 유입된 유럽 백인들에게 불하했다. 미국의 대도시에는 전세계 많은 민족들이 섞여 살지만 소도시나 시골 마을은 한국의 집성촌처럼 유럽의 같은 민족끼리 또는 교회나 종파에 따라 모여 사는 곳이 많다. 자동차로 지방도로를 이용해 여행하면 미국의 시골풍경을 자연스레 접하게 되는데 대개는 마을 입구에 묘지가 있고 그 지역 주민들을 특정짓는 건물이나 상징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나 워싱턴주 시골을 다니다 보면 풍차를 만들어 놓은 마을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네덜란드인 마을이다. 미국에는 대략 500만 명의 네델란드계 백인(Dutch American)이 살고 있다. 이들의 다수는 뉴욕과 캘리포니아, 미시간, 몬태나, 미네소타, 위스콘신, 워싱턴주에 살고 있다. 튤립과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는 전세계 금융과 보험업계를 지배한다. 국민총생산(GNP)가 한국의 2배가 넘는 세계 최고 부국 중 하나이다. 네덜란드의 부는 1500년대 후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살던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한 후부터다. 네델란드로 이주한 유대인들이 1602년 아시아와 무역을 하는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1600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고 1709년 영국 동인도 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합병되면서 런던 경매 시장에서 인도, 중국산 면화, 후추, 차와 향신료 거래로 큰 돈을 벌었다. 동인도 회사의 부를 바탕으로 1609년 네덜란드 국왕은 헨리 허드슨이라는 영국인을 고용해 지금의 뉴욕지방을 탐험케 했다. 네덜란드는 이 지역을 뉴암스테드담으로 칭하고 유대인, 퀘이커, 신교도(프로테스탄트)들을 받아들여 종교와 자유를 보장하는 네덜란드 식민지를 건설했다. 1626년에는 뉴암스테르담 책임자이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대리인 피터 미노이트와 유대인들이 인디언들에게서 맨해튼 섬을 24달러(2015년 가치로 약 1050달러 ) 상당의 옷감, 철 주전자, 도끼 머리, 괭이, 유대인의 하프와 장신구를 주고 사들였다. 영국의 군함이 쳐들어와 당시 뉴암스테르담 시민들을 몰살한 1664년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뉴욕은 실로 북미 대륙의 교역, 정치의 중심지였다.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한 영국인들이 당시 영국왕 찰스 2세의 동생 요크 공작의 (Duke of York) 직책을 따서 뉴욕(New York)으로 이름을 바꿨다. 유명한 월스트리트는 실제로 네덜란드인들이 영국군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벽을 쌓은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할렘도 당시 네덜란드 한 지방 명칭이었던 Haarlem을 본 뜬 것이었다. 그 외에 브루클린, 브로드웨이, 스테이튼 아일랜드 등 현재도 뉴욕시에는 네덜란드 지명이 많다. 미국에서 네덜란드 유대인과 네덜란드인들의 영향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유명한 네덜란드인의 후예들도 많다. 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Martin Van Buren)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뿐 아니라 뉴욕 주지사, 연방 상.하원의원 등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이들의 정치력을 뒷받침하는 것은 막강한 재력이다. 네덜란드 유대인인 최고의 발명가였던 토머스 에디슨이 사업에 실패하자 그의 전구 특허를 사들여 제너럴 일렉트릭이라는 세계 최고 기업을 일군 이도 네덜란드계 집안 루스벨트이다. 루스벨트, 밴 뷰런, 밴더빌트, 에디슨 집안 모두 뉴욕 인근에서 일가를 이루고 지금도 미국의 재계,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이들 네덜란드인들은 영국 출신의 청교도가 아님에도 미국의 권력과 정신을 지탱하는 소위 WASP 집단의 구성원으로 꼽는다. 지난 가을 북서부 워싱턴주 캐나다 국경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네덜란드 마을 린든(Lynden)을 찾았다. 1871년 네덜란드 출신 개척자들(Holden과 Phoebe Judson)이 인디언 마을 근처(Nooksack Indian Village Squahalish)에 정착하면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1891년 3월 16일 공식적으로 마을을 설립했다. 네덜란드 마을 린든시는 눅색강(Nooksack River)을 따라 넓은 계곡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곳에서 유제품, 딸기, 블루베리를 생산한다. 린든은 1900년대에도 네덜란드 이민자들이 들어왔는데 이들은 낙농업을 했다. 지난 20년 동안 인구가 두 배로 늘어 1만50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데 네덜란드계가 반 이상이다. 린든(Lynden) 프런트 스트리트(Front Street)에는 네덜란드 풍의 건물, 풍차, 음식점, 선물가게 등 눈요깃거리가 많다. 매년 8월에 열리는 노스웨스트 워싱턴 페어(Northwest Washington Fair)는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한다. 이 지역 주민들이 생산한 농산물, 미술품, 공예품을 전시하는데 가족 친화적 박람회로 유명하다. 2016년 5월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가 린든 노스웨스트 워싱턴 컨벤션센터(Northwest Washington Fairgrounds)에서 유세를 했다. 인구도 얼마 되지 않는 북서부의 끝 작은 시골마을임에도 대통령 후보가 캠페인 랠리를 가졌을 정도로 막강한 네델란드인의 재력과 정치력을 엿볼 수 있다.

2019-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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